작년 8월, 나는 그토록 오랜 시간 준비하고 기다렸던 석사 유학을 출국 3일 전에 모두 취소해 버렸다.
출국 3개월 전, '나의 커리어'만을 생각하며 정했던 미국행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다. 나의 인생은 커리어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놀랍게도 그 때서야 깨달은 것이다. 미국에서 내가 꿈꾸던 회사 생활을 하는 것이, 부모님과 함께 보낼 수 있는 한정된 시간들과 맞바꿀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인 지 확실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나는 답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미국행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우리집에서 가장 큰 캐리어 두 개를 열어 짐을 꺼내어 정리했다.
코로나로 인해 2년이 미뤄졌으니, 총 4년을 준비했던 유학을 포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파장을 내 삶에 불러 일으켰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던 나였기에, 방향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나 자신까지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다. 사라진 나를 대신한 건 공허함과 무기력함 뿐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당장 해야 하는 회사 업무를 해 내기도 벅찼기에,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이용하기로 했다. 평소에 심리상담소는 의사면허증을 가진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진단하는 정신건강의학과의 대체제일 뿐이라 생각했기에 별 기대감 없이 방문했다. 감사하게도 소위 말해서 '나와 잘 맞는' 상담 선생님을 만나, 얼마 전까지도 상담을 받게 되었다.
상담을 통해서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하고,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부모님들은 최선을 다 해 아이를 키우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아이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상처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발현이 된다. 그렇게 어른이 될 때까지 유지되어 온 상처는 부모님도, 연인도 아닌, 오직 나 스스로만이 치료해 줄 수 있다.
나 또한 막내딸로 태어나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지만, 무던한 성격의 가족들은 섬세하고 다채로운 나의 감정들을 다 이해해 주지는 못 했다. 그로 인해, 가족들과 다른 감정을 느낄 때면 스스로를 자책하며 자라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보다는 가족들이 더 옳고, 나보다는 남들이 더 정답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게 되었다. 이런 성격 탓에, 진로를 결정할 때에도 사회에서 다수가 정답이라 말하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자아는 점점 더 작아져 갔다. 상담을 받으며,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나기도 하고 부모님이 미워지기도 했다. 나를 마주하는 과정들을 통해서 점점 어린 내가 받았던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고,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나에게 집중하여 살아가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되찾게 되었다.
심리 상담을 통해서 나는 상처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내가 잘 하던 것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 몇 가지를 말 해 보자면,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 어느 날, 나는 냉장고에 가득 찬 과일들을 보고는 친구들을 집으로 모아서 생과일 쥬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A4 용지 위에 전단지를 만들어 집 전화기를 무전기 삼아(집 전화기는 어느 정도 이상의 거리를 벗어나면 통화가 끊기는 것도 모르고 무전기의 역할을 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들고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줬다. 쥬스를 주문 받으면 집으로 달려가 다른 친구가 만들어 둔 생과일 쥬스를 유리잔에 들고 (이 후 엄마한테 크게 혼 났던 것 같다) 배달을 해 드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학교에서 종종 '벼룩시장'을 여는 행사를 했는데, 나는 벼룩시장에 흥미를 느꼈는 지 주말에도 친구들을 불러 모아 돗자리 위에 물건들을 전시해 두고 판매를 했다. 5학년이 되어서는 부모님이 호주로 어학연수를 보내 주셨는데, 처음 보는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 하고 한국에서는 해 보지 못 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그 후로도 부모님을 졸라서 몇 번이나 더 해외연수를 다녀오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작은 자극들에도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섬세한 아이였으나, 도전을 좋아하며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어떻게 보면 모순되는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갖고 있기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다루는 것이 어려워 좌절감을 느낀 적도 많은 것 같다.

상담을 받으며 배운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는 '감정은 무시할수록 더 강하게 존재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다양한 감정들을 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가 인정해 주고 받아줄 때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 여전히 나는 도전을 좋아하며 호기심이 많다. 앞으로도 나는 크고 작은 도전들을 할 것이고 새로운 상황으로 나를 밀어 넣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와 달리, 두려움, 불안감, 부러움, 의기소침함, 초조함, 조급함 과 같은 부끄러운 감정이 들더라도, 감정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이렇게 말 해 줄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 줄게. 그런 기분이 들어도 최선을 다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대견하고 멋져!"
미국 행 비행기를 취소한 다음 날, 유학에 대한 목표와 함께 나 스스로도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다신 사라지지 않을 나를 찾은 것 같아 다행이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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